본문 바로가기

박해천,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by 박댐 2019. 5. 14.
반응형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워크룸프레스

0. 워크룸프레스에서 나온 박해천 선생님의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를 읽었다. 박해천 선생님의 다른 저작들을 읽어보지 않고, <아수라장의 모더니티>만을 읽고 뭔가를 쓰는게 좀 꺼려지긴 한다. 분명 "비평적 픽션" 스타일의 글쓰기 또한 이 책에서 처음 시도된 것은 아닐 것이고, 다루는 주제 또한 콘크리트 유토피아 삼부작의 완결편이라고 되어있는 걸 보면, 이 책 전의 책들과 연결고리가 분명히 있을 것인데... 일단 감명깊게 읽었으니 생각나는대로 잡썰. 오독했다고 까면 울꺼니까 속으로 비웃기만 하시길... 

박해천,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워크룸프레스

 

1. 이 책은 한국전쟁에 처음 등장했던 "전쟁 기계"에서부터 시작해서, 2층 양옥집, 마이카, 아파트-신도시, 그래픽 소프트웨어 등의 특정한 과학기술사물 혹은 이 책의 서술을 빌자면 "모더니티의 인공물"을 바탕으로 작가 나름대로 한국 현대사와 한국의 특정 사회경제적 배경(이라고 하니 좀 이상하지만, 사실 이 책에서는 정확하게 명시하고 있다. 중산층!)을 가진 집단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서술하고 있다.

 

2. 또,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 충격을 주었던 여러가지 인공물들에 대한 이미지를 독자들에게 전하고 있다. 21세기 현재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낯설 수 있는 탱크(T-34)나 양옥집에 대한 세밀한 이미지와 그 인공물들을 접했던 그때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비록 독자들이 60년대를 살아보지 않았다거나 한국전쟁의 아수라장을 겪어보지 못했더라도, 당시 이러한 인공물들이 등장했을때 사회에서 느꼈을 법한 혹은 개인적으로 느꼈을 법한 차원의 충격을 생생히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1. 사실 이 점이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힘든점일 것인데,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감정과 인식을 깔고 역사를 공부하는 것과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감성을 기반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굉장히 다르기 때문이다. 몇 세대를 거쳐오면서 몸으로 느껴온 사람들이 이야기 할 수 있는 것과 그저 기록으로만 접하는 이후 세대의 사람들이 특정 사물과 체제를 인식하고 감각하는 논리가 당연하게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 책에서는 간접적으로나마 현재 세대의 사람들에게 "옛날에 ~~가 등장했었을 땐 말이야" "옛날에 ~~가 있었는데 그게 어느정도였냐면" 같은 느낌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2.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에 있었던 왕조의 순서를 외운다거나, 유명한 왕들의 일생에서 무엇이 있었는지를 주로 배우는 한국 공교육식 역사교육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이 쉬이 읽힐 거라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는다. "그 때와 지금은 어떻게 달랐다" "그 때 사람들의 세계관은 이러저러했었는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기반으로 과거의 특정 시점을 평가 할수 있을까?" 같은 물음을 던지는데 익숙하다면 이 책을 논의의 시발점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3. 또 한가지 읽으면서 재밌었던 점은 글쓰기의 방식이었다. 나에게 오히려 친숙한 방식의 글쓰기는 각주가 빽뺵히 달린 두꺼운 책들에 가까운데, 이 책 자체는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잡지 혹은 소설에 실릴 법한 무겁지 않은 문체로 쓰였으며, 가상의 인물을 가정하여, 혹은 가상의 시점을 가정하여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의 화자는 "이층 양옥"이 되기도 하고, "변종 디자이너"-아마도 박해천 선생님 자전적인 서술일 것만 같은 마지막 장의 화자-가 되기도 한다. 보통의 현대사를 서술하는 책이라면 1차사료들이 많이 인용된다던가(1차사료 인용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역사관련 저술들이 인용되었을 텐데,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에서는 참고자료로 꾸준히 한국 현대사를 그려내고 있는 문학작품들을 호출해내고 있었다는 점이다. 

 

3-1. 애초에 장르소설이 아닌한 그다지 한국문학을 접하지 않는 나조차도 읽어본 박완서의 책을 인용할 때라던지, 생각지도 못했던 백선엽(...)의 책이 인용될 때는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서사를 엮어내기 위해 참으로 다종다양한 텍스트를 접해오셨겠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문학의 시대는 끝났다" 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듣고는 했던 것 같은데, 이 책에서 인용되는 문학 작품들을 놓고 보면 확실히 당대의 시대상이나 당대의 시선, 생각 등등을 보여주는 면이 있는 것 같아서 문학을 좀 읽어봐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4. 이 책의 또다른 특징이라 함은, 아마도 과학기술학(STS)이나 기계비평 류의 저술과 친숙한 사람들이라면 그렇지 않을지 몰라도, 사회의 제도, 법, 정치 보다 과학기술사물 혹은 현대에 만들어진 인공물을 매개체로 하여 논의를 끌고 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은 사회/제도/정치/법이 먼저이고 인공물은 나중에 따라오는 경우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익숙할 것인데, 이 책은 오히려 그 반대의 태도를 취한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인공물이 어떠한 경로로든 우리 사회에 충격적으로 등장하고, 그것을 맞닥뜨린 우리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비가역적으로 바뀌어버렸다 같은 류의 서술이 이 책의 중심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4-1. 그런 의미에서 박해천 선생님은 아예 대놓고 기술결정론자는 아닐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등장한 과학기술사물 혹은 인공물이나 인프라의 파괴력에 감탄을 보낸다는 느낌을 지울수는 없다. 근데 이게 또 저자 본인의 견해가 아니라, 이 책이 보여주고 있는 특정한 시대의 한국사회가 이렇게 저렇게 인공물들을 받아들였다라고 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했던거라면 또 딱히 할말은 없겠다만... 

 

5. 이 책의 또다른 한 축은 중산층 담론과, 세대담론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2030세대, 88만원 세대 식으로 현재의 젊은 사람들을 세대로 그룹짓는 걸 그다지 반기지는 않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름 또 생각이 바뀌기도 했다. 분명히 각 세대별로 경험해온 기술의 파괴력이 다르고 그를 통해 각 세대가 이전 세대 혹은 이후 세대와는 다른 감각과 논리를 가지게 되었을테니... 마지막 6장에서 저자가 말하듯 손으로 디자인을 접해왔던 세대와, CAD를 통해 디자인을 접하게 된 세대는 다른 감각과 논리, 세계관을 가질수밖에 없게 될 것인데... 이는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를 떠나 "변종"의 출현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려울 것이다. 

 

5-1. 저장 아이콘이 왜 디스켓 모양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디스켓이 무엇인지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디스켓이 무엇인지 설명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나마 전화선 모뎀으로 인터넷을 해봤던 사람과 스마트폰-네이티브인 사람의 차이는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천공테이프로 하는 프로그래밍이 무엇인지 혼자 찾아보아서 알지마는, 직접 천공테이프로 프로그래밍을 해보지 못했던 사람으로써 옛날의 프로그래밍과 현재의 프로그래밍이 과연 같은 행위인 것일까...생각이 되기도 하고... 무엇이 되었건 "공부"하고 "이해"해서 받아들이는 인간과 이미 존재하는 것이라서 "경험"하여 "체화"한 인간들과의 차이는 분명 대단할 것이다.

 

6. 정말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책 디자인이나 편집도 워크룸프레스이니(사실 요즘 가장 애정하는 출판사이다. 표지디자인만 보고 사고 싶어지게 만드는 출판사...) 당연하게도 이쁘고... 내용도 훌륭하고... 얼른 이 분의 다른 책들도 살것이고... 워크룸프레스의 다른 책들도 살것이다...텤마머니 플리즈...   

아수라장의 모더니티, 워크룸프레스
반응형